2009년 12월 31일
[크리스마스 판단대]겨울 나비(七日蝶)
“미안하다. 내일부터는 안 나와도 돼.”
담담한 목소리로 봉투를 내미는 사장형의 모습에 눈물마저 흘릴뻔한걸 애써 참았다. 내 손
에 억지로 봉투를 쥐어주며 가게에서 떠미는 사장형의 손길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가게
를 나올 수밖에 없었다. 가게사정이 어려운 줄이야 알고 있었지만 이정도일 줄은 몰랐기에
충격이 더욱 컸다. 졸지에 실직자 신세가 됐다는 것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 손에서 바스락
거리는 봉투의 감촉만이 이게 꿈이 아니라고 알려주고 있었다.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가 사장 형에게 다시 자리 잡히면 불러달라고 문자 한 통 남기고 멈
추었던 걸음을 다시 옮겼다. 바닥을 구르는 때늦은 낙엽마저 마음속을 을씨년스럽게 했다.
외투사이로 파고드는 냉기에 몸과 마음이 딱딱하게 굳어가는 것 같았다. 새 일자리를 구할
생각을 하니 눈이 깜깜해지는 것만 같았다. 제대로 익힌 기술하나 없는 내게 현실의 벽은
너무 잔혹했다. 당장 내일모레로 다가온 크리스마스 때 아르바이트라도 하면 되겠지만 그
다음을 생각하면 막막해질 따름이었다. 주머니 안의 봉투는 함부로 쓸 수도 없었다. 다른
일자리를 구하기 전까진 어떻게든 가진 돈으로 버텨야만 했다.
“후우”
장갑은 벗고 곱은 손을 입김으로 녹였다. 침울한 기분을 애써 떨치며 마침 옆에 있던 문구
점에서 이력서 꾸러미를 샀다.
‘이걸 써보는 것도 오랜만이네….’
일 년 정도 됐나? 이력서를 써본지도 오래됐구나 싶은 감회를 품으며 쓸 내용도 별로 없지
만 빠르게 빈칸을 채워나갔다. 고르지만 않는다면야 크리스마스 아르바이트정도는 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이력서를 들고 번화가를 배회했다.
아르바이트는 생각이상으로 빨리 구할 수 있었다. 내일부터 바로 나와서 외부가판대를 맡아
달라는 말을 듣고 나왔다. 빵집 아르바이트는 처음이지만 가판대는 처음해보는 것도 아니니
다행이었다. 불행하기만 한 것도 아니구나 싶었다. 안심이 되어 단칸 자취방에 돌아와 온기
에 파묻혀 정신없이 잠에 빠져들었다.
날씨가 추운 것을 제외하곤 그다지 힘들지 않아 다행이었다. 무엇보다 취객을 상대하지 않
는다는 점이 만족스러웠다. 계속해서 상대해야하는 것이 사이 좋아 보이는 가족, 커플들이
란 점이 부러움으로 마음을 쿡쿡 쑤시게 한다는 것만 빼곤 매우 만족스러웠다. 게다가 크리
스마스 단기가 아니라 장기아르바이트로 계속해보진 않겠냐는 제의도 받아 당분간의 걱정을
덜어 한결 맘이 편하게 퇴근할 수 있었다.
사방에 반짝이는 전구와 캐럴들이 이미 10시가 넘어감에도 거리를 가득매우고 사람들도 그
에 이끌리듯 여전히 거리를 거닐고 있었다. 오직 나만이 어딘가 분위기에 어긋난 느낌으로
조용히 흐름을 벗어나 발걸음을 옮겼다. 크리스마스에 들뜬 기분을 어째서 잊어버린 것일
까? 작년에도 이런 기분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많은 것을 잃어버린 듯 한 기분이 가슴을
적셔왔다. 쓸쓸함이 가슴을 채우듯 주변의 광채와 사람들의 모습이 주변에서 뜸해짐을 느끼
고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빛하나 없는 캄캄한 밤하늘이 길가의 낮은 건물들 사이로 올
려다 보인다. 가로등 불빛을 반사하며 하얗게 빛나는 내 입김이 밤하늘의 어두움을 채색하
며 희미해지는 것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발걸음을 멈추고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딱히 떠오
르는 것도 없지만 가만히 눈도 깜빡이지 않고 하늘만을 바라보았다. 손에 들고 있던 케이크
의 무게가 문득 떠오를 때까지 그러고 있다가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몇 걸음을 옮
겼을 때서야 눈치 챘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조용한 자취방에 돌아왔을 즈음에는 펑펑 쏟아지기 시작한 눈 탓에 어깨에도, 들고 있던 케
이크 상자에도 소복이 눈이 쌓여있었다. 제법 쌓일 기세인 게 내일 아침이 걱정됐다. 눈이
쌓이면 커플들은 좋아할지 몰라도 내겐 그 정도로 여유 있는 감성 따윈 이미 사라진지 오래
였다. 눈이란 건 내겐 귀찮기만 한 물건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손으로 눈을 툭툭 털어내
고 방에 들어섰다.
훈훈한 공기가 몸을 감싸며 추위에 굳은 얼굴이 부드럽게 풀어짐을 느꼈다. 조금은 사치스
러울 정도의 서비스가 좁은 방을 커버해주는 몇 안 되는 장점이다. 하지만 돈을 생각하면
이 방도 빼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머리를 스쳤다. 어제까지만 해도 하지 못
했던 생각이었지만 갑작스런 실직과 큰돈이 안 되는 아르바이트가 겹치자 내 생각 또한 바
뀐 듯 했다.
‘당분간은 지켜볼까…?’
빨리 알아보는 것이 좋겠지만 훈훈한 공기가 내 마음을 망설이게 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 온기가 새어나갈 새라 재빨리 문을 닫고 발을 비벼 신발을 벗으면서 그런 생각은 마
음 한편으로 밀려났다. 그리고 케이크를 들지 않은 손으로 전등스위치를 올리는 순간 흔적
도 없이 사라졌다. 내 눈에 펼쳐진 광경 탓에.
좁은 방 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알을 연상시키는 상자. 어째서 각이진 상자를 보고 알을
연상시켰는지는 모르겠지만 빨간 리본이 메여진 하얀 상자는 그 크기를 과시하며 방 한가운
데에 버티고 있었다. 그리고 빨간 리본에는 작은 카드가 매달려 있었다. 다가가서 집어 들
어 읽어보았다.
to. 정일우님께
소중히 대해주세요.
‘선…물?’
선물인가 생각해봤지만 산타클로스도 아니고 내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줄 만한 사람이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연락조차 끊은 부모님에겐 주소조차 알려드리지 않았고, 집주인 아줌마는
선물을 주고받을 만한 사이는 아니었다. 택배로 온 듯하다 않고 무엇보다 잠긴 방 안에 놓
인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진짜 산타일까?’
문득 떠오른 어린애 같은 생각을 머리를 흔들어 재빨리 지웠다. 그리고 케이크를 옆에 내려
놓으며 상자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이렇게 보니 어지간히도 큰 상자다. 거의 앉은키에
가까운 높이에 옆으로도 꽤나 넓어서 낑겨앉으면 사람 두 명 정도는 충분히 들어갈 듯한 크
기였다. 이래서야 방에 누울 자리도 거의 없을 지경이었다. 카드를 보니 내게 온 것은 틀림
없어 보이지만 과연 열어봐도 될지 의문이었다. 그래도 가슴에 솟아오르는 호기심에 내 손
은 새빨간 리본매듭으로 향하고 있었다.
매끈거리는 리본의 감촉에 ‘비단일까?’하는 의문을 떠올리며 풀어내자 리본이 사르륵 풀리
며 미끄러지듯 상자에서 흘러내렸다. 그리고 리본에 가려져있던 이음매에 손가락을 걸고 조
심스럽게 들어올렸다.
긴장감에 입에 고인 침을 삼키며 손에 힘이 실리고 뚜껑이 열리며 상자의 내부가 서서히 모
습을 드러냈다. 그곳엔 폭신폭신해 보이는 하얀색 쿠션더미에 둘러싸인…
소녀가 있었다.
“…….”
할 말을 잃고 굳어져 있는 내 앞에서 소녀는 상자 안에 무릎을 감싸 안고 잠든 듯이 눈을
감고 있었다. 옷은 흰 쿠션과 대비되 눈에 확 띄는 붉은색 벨벳의 원피스, 전체적으로 앳된
인상이 후줄근한 자취방과는 너무나 다른 세상의 존재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어딘가 낯익은
느낌이 머리를 스쳤다. 데자뷰일까?
“으응….”
소녀의 신음소리에 화들짝 놀라 나도 모르게 바닥을 기어 물러섰다.
‘나 뭐하는 거람?’
후회하며 다시 상자 앞으로 돌아가자 소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올려다보고 있었다. 너
무나도 맑은 눈동자가 마치 내 모습을 그대로 담아내는 듯 한 느낌에 나도 모르게 가슴이
세차게 요동쳤다. 그 느낌에 당황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느낌이었다. 이미 오래전에 죽은
줄 알았던 느낌이 새삼 되살아났다. 하지만 내 상태는 아랑곳 않고 소녀는 긴 생머리를 늘
어뜨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듯 한 순진한 눈빛에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
같아 시선을 피했다.
“안녕하세요. 정일우님.”
“어, 어? 아…안녕.”
갑자기 입을 연 소녀의 말에 얼떨결에 대답을 해버리고 말았다. 잘못 왔다던가 하는 건 아
닌가보다. 애초에 사람이 포장되어 배달 온 것부터 이해되질 않지만 소녀의 신비한 분위기
에 나도 모르게 감화되는 듯 한 느낌이었다. 왠지 그냥 납득하고 받아들일 것 같은 느낌에
애써 궁금증을 끌어 모아 물어보았다.
“근데 넌 누구…?”
“제 이름은 칠일접이예요. 정일우님.”
“님 자는 됐고, 내가 물어본 건 그런 게 아닌데….”
“그럼 무엇이 궁금하신가요?”
당돌하게 또박또박 대답해오는 이상한 이름의 소녀 덕에 할 말이 궁해지고 난처함이 밀려왔
다. 왠지 낯익은 이목구비에 혹시 본 적있는 아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출소녀
일까? 가명치고는 노골적으로 이상한 이름이지만 다시 한 번 물어보기로 했다.
“부모님은?”
“에…없습니다? 기억이 나지 않아요.”
‘굉장히 수상해!’
고개를 갸웃거리며 떠올리려 애쓰는 척하는 건지 진짜로 모르는 건지 소녀의 표정만으론 알
도리가 없었다. 역시 경찰에 맡기는 게 좋을까 싶어서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그러자마자 소
녀가 벌떡 일어서더니 나를 저지하려 달려들었다.
“잠깐만요! 신고하지 마세요!”
“우왓?! 자…잠깐!”
갑자기 내 휴대폰을 잡으려 매달리는 소녀 탓에 균형을 잃고 뒤로 쓰러졌다. 마침 뒤에 있
던 장롱에 부딪혀 머리가 아파왔지만, 그보다 내 가슴팍에 느껴지는 감촉이 신경 쓰였다.
만화도 아니고, 기묘하게 뒤엉켜서 쓰러져 소녀는 내 가슴팍에 포개지듯 달라붙어 있었다.
그리고 신경 쓰이는 감촉은 그곳에서 느껴지고 있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하지만 소녀는
내 그런 상태는 알아채지 못한 듯 애원했다.
“신고는 제발 하지 말아주세요. 7일간! 딱 7일만 있을테니깐요.”
“아…알았어. 알았으니깐 떨어져주라.”
“정말이죠?”
“그래! 그러니깐 좀….”
애원하는 소녀의 목소리보다 가슴에 느껴지는 감촉이 신경 쓰여 마지못해 승낙하자 그제야
소녀가 떨어져서 약간 떨어진 방바닥에 다소곳이 앉았다. 소녀도 그제야 방금 전의 상황을
알아챘는지 살짝 얼굴이 상기되 있었다.
‘왠지 원피스 안에는 아무것도 안 입은 듯한…나 참 무슨 생각을 하는 거람?’
쓸데없는 생각을 떨치며 방금 전 일로 상자가 쓰려져 여기저기 흩어진 쿠션을 주워 모았다.
고급품인지 제법 부드럽다고 생각하자 쓸데없는 것까지 떠오를 뻔 한 것을 애써 머리한구석
으로 밀어놓았다. 일단 약속도 했고 사정도 있어보였기에 경찰에 신고하는 것은 단념했다.
이대로는 내가 곤란하니 장롱에서 옷을 몇 벌 골라냈다. 남자치곤 깡마른 내 체형 덕에 다
소 크긴 하겠지만 못 입을 정도는 아닐 것 같았다. 속옷까진 어쩔 수 없지만 일단 겉옷이라
도 입혀야 안심이 될 것 같았다. 지금 복장은 여러 가지로 위험했다.
“일단 옷부터 갈아입어. 난 돌아 서 있을 테니까.”
“네에….훔쳐보시면 안 돼요.”
“알았으니깐… 불안하면 나가있을게.”
그렇게 말하고 몸을 일으키자 소녀가 내 손을 잡아왔다.
“아뇨. 밖에는 … 춥잖아요.”
“그래….”
맞잡힌 손에 두근거린 가슴을 숨기며 다시 자리에 벽을 보고 주저앉았다. 가슴이 쿵쾅거려
쉽사리 진정되지 않았다. 그리고 뒤에서 들려오는 사락거리는 옷 스치는 소리에 더 가슴이
두근거려왔다. 나도 참, 열 살은 차이나 보이는 여자애한테 왜이러는걸까? 눈을 질끈 감고
얼른 옷 갈아입기가 끝나길 기다렸다.
“저어, 다 갈아입었어요.”
소녀의 목소리에 돌아보자 후줄근하게 흘러내리는 옷을 점여매 아슬아슬하게 걸치고 있는
모습에 눈에 들어왔다. 이건 또 이것대로 자극적인 모습이었다. 쭈뼛거리는 게 아무래도 불
편한 듯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속옷이라면 내일 어떻게든 해줄게. 아르바이트 하고 오는 길에라도.”
어려운 사정이라도 앳된 여자애를 함부로 방치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약속도 있고 왠지
모를 믿음이 있었다. 사장 형은 이런 날 보면 단순히 무른 거라고 말했겠지만 어쩔 수 없었
다.
“아뇨, 거기까지 폐를 끼칠 수는….”
“그냥 있는 게 오히려 나에겐 폐니깐 신경쓰지 마. 날도 늦었고 일단 자는 게 어때?”
“네에.”
왠지 기죽은 듯 한 반응에 의아해하며 이불을 내밀었다. 여자애를 이불도 없이 재울 순 없
는 노릇이었다. 비록 내가 덮을 이불은 없지만 방이 훈훈하니 별 문제는 없었다. 소녀가 마
지못해 쿠션더미에 몸을 묻고 이불을 덮는 것을 보고는, 전등을 끄고 벽에 대충 베개를 기
대놓고 거기에 기대어 잠을 청했다.
‘아침에 몸이 괴롭겠지만 아무려면 어떠냐.’
아침에 잠에서 깨어났을 때 몸이 푸근한 느낌에 감싸여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코끝을 간
질이는 기분 좋은 향기와 어깨에 느껴지는 가벼운 무게감을 느끼며 눈을 떴다.
깨어난 순간 멍한 머리 탓에 상황이 잘 파악되지 않았다. 어젯밤 일이 멍한 머릿속에서 단
편적으로 떠오르고 눈동자를 굴릴 정도가 돼서야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소녀는 내 어깨에 기대어 잠들어 있었고, 그녀가 덮고 있던 이불은 나와 그녀를 전부 감싸
덮고 있었다. 밤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 여자애와 한 이불(?)에서
잔 모양이었다. 화들짝 놀라서 일어서려던 것을 간신히 눌러 참았다. 소녀를 함부로 깨울
순 없었다.
멍하니 서리 내린 창문을 보다가 팔의 저림이 참기 힘들어 올 때가 되자, 문득 시계를 바라
보았다. 일찍 일어난 보람이 없이 40여분의 시간이 지나 아르바이트 시간이 조금 아슬아슬
해 왔다. 그렇게 여유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평소처럼 차려먹고 갈 여유는 없어보였다. 곤
히 자는 것을 깨우는 것은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이 깨우기로 했다.
“저기, 일어나주지 않으면 곤란한데.”
말을 걸며 가볍게 어깨를 흔들자 의외로 쉽게 소녀는 눈을 뜨고 어깨에서 떨어져나갔다. 하
지만 아직 완전히 깨어난 것은 아닌 모양인지 멍한 눈빛으로 내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떻게 말을 걸어야 될진 모르겠지만 그래도 급히 떠올린 인사말을 입에 담았다.
“메리크리스마스.”
“예. 메리크리스마스예요….어라?”
소녀의 눈빛이 맑아지는 걸 보아하니 이제야 제대로 깨어난 모양이었다. 당황한 건지 안절
부절못하는 소녀는 내버려두고 일단 몸을 일으켰다. 뻐근한 어깨를 한 바퀴 회전시켜 풀어
주고는 소녀에게 말을 걸었다.
“음. 배고프지 않아? 난 좀 출출한데.”
“아뇨. 그다지…”
꼬르륵
“뱃속은 그런 것 같지 않은데? 혹시 어제 하루 종일 굶었어?”
얼굴이 붉어진 소녀가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이는걸 보고 한숨이 나왔다. 설마 상자에
하루 종일 있던 걸까? 왠지 미안했다. 하지만 시계를 보니 뭔가 제대로 된 식사를 대접하기
엔 무리가 있어보였다.
“제대로 된 아침밥을 해주고 싶지만, 아르바이트가 있어서 그러는데 케이크로 괜찮아?”
스스로가 생각해도 성의가 없지만 그나마 어제 받아온 케이크라도 있는 것이 다행이었다.
소녀가 고개를 끄덕이는걸 확인하고 냉장고에서 케이크를 꺼내왔다. 조심스럽게 케이크를
꺼내고 식기들을 꺼내자 왠지 부끄러운 느낌이 가슴을 간질였다. 여자애와 케이크를 사이에
두고 마주앉아 본 적이 얼마만일까?
‘…응? 뭔가 기억날 듯 한…아, 시간!’
“앗, 미안. 같이 못 먹을 것 같네. 먹고선 냉장고에 넣어줘, 아르바이트에 지각하면 큰일이
라서.”
“아…. …네.”
서둘러 외투를 집어 들고 대충 머리를 매만지며 집을 나섰다. 뒤에서 소녀가 나를 부르려는
듯 한 기색이 느껴졌지만 기분탓이겠지. 한순간 소녀를 혼자 놔둬도 될까 싶었지만 왠지 나
쁜 아이는 아닐 거란 근거 없는 믿음이 마음에 떠올랐다. 딱히 가져갈만한 물건도 없고…
갈 곳도 없어보였으니까.
다행히 아르바이트엔 지각하지 않을 수 있었다. 너무 바빠서 하루 종일 굶주린 채로 일해야
했지만 말이다.
“이게 뭐람….”
작게 중얼거리며 손등을 벅벅 문질러본다. 아침에 일을 시작하기 전만해도 눈치 채지 못했
던 것이 이상한 일이 일어나 있었다. 손등에 생긴 새빨간 나비문양이 근무 내내 너무나 신
경 쓰였다. 내가 자는 동안 그 소녀가 그려는 모양인 듯 한데 예쁘긴 하지만 왠지 쪽팔리기
도 했다. 게다가 뭐로 그려논건지 틈나는 대로 씻어 내보려 했지만 지워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내 손등만 아플 뿐이라 포기할까 하는 마음이 슬슬 고개를 들고 있었다.
‘그 애한테 물어볼까?’
아마도 그 애가 그려 논 것일 테니 지울 방법도 있을 거라 기대하며 발걸음을 재촉해 집으
로 돌아왔다.
집에 도착할 즈음이 되자 그 애가 떠나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왠지 남아있을
것 같은 예감을 느끼며 자취방의 문 앞에 섰다. 딱히 대단한 일도 아니고 내 자취방이지만
긴장감으로 입안에 침이 고였다. 그것을 꿀꺽 삼키며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어?”
순간 내가 방을 착각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낯익은 가구들과 벽지, 벽에
기대 잠든 소녀의 모습을 보고 방에 잘못 들어오진 않았음을 깨달았다.
‘내 방이 이렇게 넓었나?’
오랜 자취 탓에 정리하는 버릇이 생겨 남자 방치곤 깔끔한 편이라고 자부하고 있었지만, 역
시 제대로 청소한 것만 하진 못했나보다. 아무래도 칠일접-이라고 묘한 이름을 가진 이 애
가 치워준 모양이었다. 이런 것을 해줄 줄은 몰랐다. 그리고 그런 그녀는 지쳤는지 벽에 기
대어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쿠션을 껴안은 채 벽에 기대어 곤히 자는 모습이 귀엽고 미
안해서 손등의 문양에 대해 추궁할 마음도 들지 않았다. 장롱에서 얇은 모포 한 장을 꺼내
어 덮어주었다. 손님-이라긴 뭐하지만 이런 소녀에게 이런 일을 하게하다니 면목 없고, 동
시에 매우 낯익은 느낌이 가슴 속을 술렁였다. 그리고 그제야 소녀의 곁에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앨범?”
‘내가 이런걸 가지고 있었나?’
생각해보면 자취방 어딘가에 앨범이 박혀있어도 이상할 게 없었다. 애초에 되는대로 집에서
챙겨온 물건들이 많았기에 방에 무엇이 있는지 전부 기억하고 있진 않았다. 그런 물건 중에
앨범이 있었고, 소녀가 그것을 발견해서 봤다 고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나도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의 내 모습들이 잘 알지도 못하는 소녀에게 보여줬다는 것이 왠지 부끄러워 얼
굴이 화끈거렸다.
‘오랜만에 앨범이나 한번 볼까?’
호기심이 동했다. 예전의 나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궁금증이 솟아올랐다. 소녀가 깨지 않도
록 조심스럽게 손을 치우고 앨범을 집어 들었다.
앞페이지부터 차례대로 시간의 흐름이 느껴지듯 나의 성장하는 모습이 꽂혀있었다. 여자애
한테 보이기 부끄러운 사진도 적잖이 있어서 얼굴이 한층 더 화끈거렸다. 내가 성장함에 따
라 그런 사진은 거의 사라졌지만 말이다. 부모님이 이렇게나 내 사진을 많이 찍고 모으셨다
는 게 이제야 생각났다. 지금은 안 계신 부모님과의 추억이 사진 한장 한장을 따라 기억 속
저편에서 떠올랐다. 입 꼬리가 말려 올라가는 것이 느껴졌다. 내가 이렇게 기분 좋게 미소
지어본게 얼마만이더라?
페이지가 넘어감에 따라 사진 속의 나는 성장해갔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그리고…
그녀가 있었다.
생각났다. 내가 가장 소중히 했고 사랑했던 사람. 부모님을 잃은 나를 지탱해주었지만, 역시
사라졌던 사람…. 내가 잃어버린 연인의 사진이 있었다. 그리고 내 앞엔 똑같은 얼굴이 잠
들어 있었다. 그때 그 모습 그대로!
“우응….”
내 머리 속을 정신없이 몰아치는 혼란은 아랑곳 않고 작은 신음소리와 함께 눈앞의 소녀가
눈을 떴다. 나는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수많은 말이 머리를 스쳤지만 입에서 나온 말
은 하나였다.
“넌…누구야?”
“네?”
내 질문에 무슨 말이냐는 듯 고개를 갸웃하던 소녀는 내 손에 들린 앨범을 눈치 채자마자
얼굴에 핏기가 가시기 시작했다. 새하얗게 변한 얼굴로 말을 하지 못하던 소녀는 떨리는 목
소리로 간신히 입을 열었다.
“본…거예요?”
“어째서 네 얼굴이 걔랑 똑같은 건데?”
“제가 한소영이니깐요.”
“그 말을 믿을 수 있을 것 같아?!”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소녀를 믿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와 너무 닮은 것
도 사실이었다. 단순히 닮은 것만이 아니고 이름과 기억마저 쏟아내기 시작한 소녀에게 내
가 부정할 방법 따윈 없었다.
“믿을 수 있겠지?”
“믿고 자시고…하지만 분명 넌…”
어느새 말투까지 기억 속의 그녀로 돌아온 소녀의 모습에 반신반의한 나는 말을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다. 상식을 초월한 일을 이해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하지만 눈앞의 현실을 부
정하는 것 또한 불가능했다. 지금까지 내가 죽여온 내 안의 모든 것이, 이 소녀가 한소영
본인이라고 부르짖고 있었다.
“난 분명히 그때 죽었어. 하지만 일우가 보고 싶어서 잠시 돌아왔어. 단지…어? 어라? 왜
우는 거야?!”
“어라? 어?”
그제야 난 내가 눈물을 흘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소매로 닦아봤지만 흘러넘친 눈물이 멈출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지난 몇 년간 눈물은 완전히 말라버린 줄 알았건만, 내게 아직도 이
리 많은 눈물이 남아있었나 싶을 정도였다.
“아이참, 울지 말라니깐. 변함없네.”
나를 도와 소매로 닦아주는 소영이의 모습에 그리움이 느껴졌다.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지.’
그때는 지금처럼 울면서 웃는 상황은 아니었지만, 그때도 소영이가 내 곁에서 내 눈물을 소
매로 훔쳐주던 것은 기억났다. 하지만 난 이렇게 변해버렸는데 소영이는 그때 그 모습 그대
로구나. 하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기뻐서…기뻐서 눈물이 멎질 않네?”
“내가 온 게 그렇게 기뻐?”
“당연하지!”
“고마워.”
나도 모르게 소리쳐 대답하고 조금 부끄러웠지만, 너무나 담담히 고맙다고 말하는 소영이의
모습에 그마저도 가슴 속에서 사라졌다. 말없이 소영이의 자그마한 몸을 품안에 안았다.
‘소영이의 몸. 이렇게 작았구나. 아니, 내가 큰 건가?’
품안에 느껴지는 존재감에 현실임을 실감하며 소리 없이 울었다. 그리고 내 품안에서 소영
이 역시 울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헤어진 지 10년이란 세월을 넘어서 우리는 재회했다.
밤늦게까지 이런저런 추억을 얘기하다보니 아침에 잠에서 깨어났을 때 심한 피로감이 몸을
짖눌러왔다. 아직 소영이와 미처 다 나누지 못한 이야기가 많지만 시간은 있고 더 이상 소
영이에게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고 싶진 않았다.
‘이 나이 먹도록 제대로 장래조차 없는 것만으로도 부끄럽지만….’
크리스마스가 어제이긴 했지만 하루 늦은 뒷북으로도 분위기를 즐기려는 지각손님도 있는데
다 오늘까진 일손이 부족하다기에 오늘도 알바는 나가야만 했다. 곤히 잠든 소영이에게 이
불을 덮어준 후 간단한 아침식사까지 차려놓고 자취방을 나섰다.
‘색이 연해졌네….’
손등의 무늬가 주황색으로 변한 것을 보고 안도했다. 혹여나 지워지지 않는 건 아닐까 걱정
한 내가 바보 같았다. 서둘러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매장으로 내려갔다.
“안녕하세요.”
“일찍 왔네? 응?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나? 얼굴이 환하구먼.”
“예, 뭐. 그런 일이 있어서….”
“애인이랑 잘 풀렸나보지?”
“뭐 비슷한 거죠.”
점장아저씨의 묘하게 날카로운 농을 받아넘기며 청소부터 시작했다. 오늘 하루 열심히 하면
내일은 쉴 수 있을지 모르니깐 농땡이 피우지 않고 성실히 일했다.
“아-삭신이야.”
삼일간의 격무로 온몸이 노곤했다. 익숙지 않은 일이라서 그런가? 몸 여기저기가 노곤하다.
솔직히 크리스마스 다음날까지 이렇게 바쁠 줄은 생각도 못했다. 기세를 보아하니 내일도
이럴 것 같아 내일 쉬는 것은 반쯤 포기하고 있었다. 다행히 점장님의 호의로 내일 하루는
쉬라는 말을 듣고 환호성을 지를 뻔했다. 그리고 월요일부터는 오후부터 저녁타임까지로 널
널하게 시간대가 잡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기쁜 것을 꼽으라면 내일의 휴일이었
지만 말이다. 머릿속에선 소영이와 내일 어떻게 보낼까에 대한 생각이 정신없이 쌓이고 있
었다. 하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아서 고민이 되었다. 사실은 소영이와 함께라면 무엇을 해도
상관없었지만…
자취방에 돌아오자 또다시 내 앨범을 보고 있는 소영이의 모습이 보였다.
“질리지도 않아?”
“응. 전혀. 게다가 본지 얼마 되지도 않았어.”
배시시 웃는 소영이의 모습에 대답이 궁해져 시선을 돌렸다. 아침에 나설 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 방 안의 모습도 그렇고, 소영이도 내 옷을 그대로 입고 있는 것을 보니 밖에 나가진
않은 모양이었다.
‘돈도 두고 갔는데….’
“밖에 나갔다오지 않았어?”
“응. 왠지 무서워서… 모르는 게 너무 많아.”
그러고 보면 소영에게 10년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미처 그것을 생각지 못했던 것에
후회감이 들었다. 풀이 죽은 소영의 모습에 참을 수 없는 충동이 밀려왔다. 소영의 작은 몸
을 가슴깊이 끌어안았다. 나의 미안함과 죄가 겨우 이런 행동으로 갚아질리 없지만 내 마음
을 조금이라도 알리고 싶었다.
“어? 왜이래. 답답…일우야, 울어?”
“미안해. 미안해….”
“아이참, 울지 마. 나까지 울고싶어지잖아.”
소영이의 목소리도 눈물에 잠겨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는 그대로 조용히 눈물을 흘
리며 늦은 밤까지 서로를 꼬옥 안은 채로 있다가 잠에 빠져들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는 휴일이라 헤이해진 탓인지 이미 해가 중천에 떠있을 무렵이었다. 이
미 아침을 먹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라고 생각하며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먼저 일
어나 있었는지 벽에 기대어 또 내 앨범을 들여다보고 있는 소영이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볼 것도 없는 앨범을 작은 점 하나까지 외울 기세로 틈만 나면 펼쳐
보는게 웃겨서 피식 웃어버리고 말았다. 내 웃음을 눈치 챘는지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며 소
영이가 툴툴댔다.
“왜 웃는 거야!”
“지겹지도 않아? 그거만 계속 보고 있으면.”
“괜찮아, 재미있으니깐!”
“그래?”
몇 번이나 한 문답이지만, 재미있다는데 나도 어쩔 수 없었다. 평온한 기분. 오랜만이다. 소
영이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휴일이라고 소영이와 놀러갈 곳을 정신없이 계획하던 어제의
내가 바보 같았다. 지금 내가 소영이에게 해주고 싶고, 해줘야 할 일을 깨달을 수 있었다.
“소영아.”
“응?”
소영이가 들여다보고 있던 앨범에서 눈만 돌려 나를 바라봤다.
“오늘 나 쉬는 날이거든. 쇼핑가지 않을래? 외식도 하고.”
“…괜찮아?”
“물론이지. 계속 함께 지내려면 이것저것 필요한 게 많잖아.”
“…응.”
순간 스친 소영이의 왠지 어두운 표정과 대답까지의 짧은 침묵이 조금 신경 쓰였지만 기분
탓이라고 생각했다. 아니면 아직 무서운 거겠지. 하지만 내가 곁에 있을 테니 걱정할 것은
없었다. 간단히 씻고 지갑 등을 챙겨서 소영이와 함께 자취방을 나섰다.
크리스마스의 여운이 남은 건지 상점가에는 많은 사람들이 붐비고 있었다. 캐럴도 여전히
거리를 그 음색으로 덧칠하고 있었다. 내게는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고 10년 전도 그다지
기억에 남아있지 않아 잘 모르겠지만, 소영이에게는 그렇지 않은지 신기한 눈으로 연신 거
리를 두리번거리기 바빴다.
“그렇게 신기해?”
“응. 이렇게 바뀌었구나. 굉장히 화려해. 신기한 것도 많고.”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서도 희미한 불안감은 남은 모양인지 내 손을 꼭 잡고 놓지 않고 있었
다.
“자, 옷부터 사자. 그대로는 춥잖아.”
“응.”
소영이에게 다소 큰 내 옷은 헐렁해서 조금 추워보이는게 사실이었다. 잘 여며 입긴 했지만
맞는 옷에 비할 바는 못되었다. 오는 길에 충분히 돈도 인출해뒀으니 걱정 없었다. 내가 입
을 옷도 아니고 소영이가 입을 옷에 그다지 돈을 아낄 생각은 없었다. 소영이에겐 조금이라
도 더 좋은 것을 해주고 싶었다.
“애도 아니고….”
“이팔청춘 소녀인걸 뭐~”
“이런 때만 소녀냐….”
“아저씨~ 베~”
혀를 쏙 내밀며 나를 약 올리는 소영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빨간 색을 그렇게 좋아했던
가?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근데 다시 나타났을 때도 그렇고 지금도 이렇게 빨강과 흰색투
성이인 것을 보니 어지간히도 좋아하는 것 같다. 아니면 산타가 좋다던가. 내 무미건조한
회색 반코트와는 대조적으로 그녀는 자그마한 여자 산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화려해
서 단연코 눈에 띄는 모습이다. 보는 입장에선 즐겁지만…
“어때? 귀여워?”
“물론이지.”
몇 번이고 반복된 문답이지만 내 대답엔 변함이 없었다. 옷을 갈아입은 후부터 심하게 들떠
있지만 말릴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나 역시 그런 기분이었으니까. 같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그 후, 식사도 하고 영화도 보며 저녁 늦게까지 우리는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흔하디흔한
데이트라고 볼 수 있겠지만 우리에겐 더없이 특별한 시간이었다고 단언할 수 있었다. 외모
에는 10년이란 넘을 수 없는 세월이 있지만, 마음만은 10년의 세월에도 변함이 없었다.
“뭔가 잘못된 건가?”
소영이를 자취방에 혼자 두는 것은 걱정됐지만, 꿈같은 어제의 기억을 뒤로하고 오늘도 알
바를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유니폼으로 갈아입다가 손등의 이상을 발견했다. 어제 분
명히 노란색으로 희미해졌던 나비문양이 어느새 선명한 녹색 빛으로 바뀌어 있었다. 걱정돼
서 닦아내보려고 해도 여전히 지워질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매일 색이 바뀌는 무늬라니,
빨강, 주황, 노랑, 초록…
‘이건 마치… 무지개색?’
동시에 첫 재회에서 소영이 한 말이 머리를 스쳤다.
<신고는 제발 하지 말아주세요. 7일간! 딱 7일만 있을테니깐요!>
‘그건 대체 무슨 의미였을까?’
뭔가 가슴 속에 한기가 맴돌며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이 가슴 속에 술렁였다. 하지만 곧
들려온 점장아저씨의 부름에 깊게 생각하는 것을 포기했다.
그날 밤, 소영이는 또다시 앨범을 펼쳐들고 거기에 몰두해 있었다. 오늘은 보기만 하는 게
아니라, 내가 퇴근길에 찾아온 사진들을 공들여 한 장 한 장 끼워 넣고 있었다. 어찌나 사
진 찍는걸 좋아하는지, 어제 데이트 내내 일회용 카메라를 몇 개나 소모해가며 나와 함께한
이런저런 모습을 찍었던 것이다. 덕분에 제법 두껍던 앨범이 거의 가득차, 겨우 한 장이 남
았을 뿐이었다.
‘다음 데이트 때는 앨범이랑 사진기나 사줄까?’
그런 생각을 하며 문득 아까의 의문이 떠올라 소영이에게 물었다.
“소영아.”
“응?”
“혹시 이거 알아?”
그렇게 말하며 손등을 들어보였다. 이제는 초록빛이 된 나비문양은 소영이가 온 후 생겨났
으니 아마도 소영이와 연관이 있을 듯 했다. 무슨 의미인지, 아니면 별 의미 없는지도 모르
지만 알고 있다면 소영이가 알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그리고 그게 정답이었는지 소영이 눈
에 띄게 당황했다.
“…응. 나도 있는걸.”
마지못해 일하며 자신의 손바닥을 내보이는 소영이를 바라보았다. 역시 이 무늬는 소영이가
그려놓은 것일까?
“네가 그려 논거야? 색깔이 계속 바뀌던데.”
“특별한 거라서. 며칠 있으면 지워질 거야.”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고.”
더 이상 아무 것도 묻지 말아달라는 분위기를 팍팍 풍기는 소영이에게 굳이 애써서 듣기도
뭐했다. 그래서 더 이상 파고드는 것은 포기했다. 뭔가를 숨기는 건 분명한 것 같지만 더
이상 파고들어 괜히 소영이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진 않았다.
딸랑
맑은 종소리와 함께 문을 열고 들어섰다. 아늑한 분위기지만 저녁시간대 치고는 손님이 뜸
한 커피숍이다. 이곳에 온 이유는 일하는 중에 걸려온 한 통의 전화 때문이었다. 지난 며칠
간 연락이 없던 사장형의 전화였다. 일이 잘 풀렸는지 며칠 전의 기운 없는 목소리가 아니
었다. 그리고 할 말이 있는지 일이 끝나고 이곳에서 만나자고 한 것이었다. 가게에 들어서
자 가볍게 손을 흔들어 나를 부르는 정우형의 모습이 보였다.
“간만이에요, 형.”
“며칠 사이에 얼굴이 많이 폈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었나봐?”
“그러는 형이야말로 신수가 훤해졌는걸요?”
아닌 게 아니라 형의 모습은 며칠 전과는 상당히 달라져 있었다. 신경은 쓰는 것 같지만 서
툰 탓에 어딘가 엇어하고 부스스하던 인상이 완전히 말끔하게 변한 것이 아주 다른 사람 같
았다.
“뭐 그런 일이 있었…응?”
웃어넘기려던 형이 문득 말을 멈추더니 나를 향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일우야. 잠깐만 왼손 좀 내밀어봐.”
“아, 네.”
너무나도 진지한 표정에 떨떠름하게 손을 내밀었다. 거기에 특별한 것이라곤 이젠 파란색이
되어버린 나비문양 뿐이었다. 궁금증이 다시 고개를 쳐들었다.
“이게 뭔지 아세요, 형?”
“너, 칠일접을 만난거야?”
‘칠일접?’
들어본 적이 있는 단어다. 분명히 상자에서 소영이가 처음 나왔을 때 댄 가명이 칠일접이었
다. 거기에 뭔가 의미라도 있는 것일까?
“칠일접이 뭔데요? 이 무늬랑 무슨 연관이라도 있어요?”
“반응을 보니 만난 건 확실한가보네. 근데 아무런 얘기 못 들은 건가?”
미심쩍은 표정으로 날 바라보는 형의 모습에 억눌린 답답함이 폭발할 것만 같았다. 도대체
칠일접이 뭐길레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건지 모르겠다. 소영이와 같은 사례가 더 있기라도 한
건가?
“설명해주세요. 뭔가 알고있는거죠?”
“알고 있지. 나도 만났으니깐. 근데 듣고 후회할지도 모르는데? 아니, 안 듣는 게 후회되겠
구나. 벌써 파란색이니깐.”
불길한 선배의 말투에 등골을 따라 식은땀이 흘러내리는게 느껴졌다. 듣고 나면 돌이킬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알고 싶다는 욕망이 두려움을 앞섰다. 스스로도
느껴질 정도로 경직된 목소리로 대답했다.
“설명해주세요.”
“뭐, 나도 별로 많은걸 아는 건 아니야. 그냥 정리하자면, 첫째로 죽은 사람이 누군가를 그
리워하여 어떤 자와 계약한 게 칠일접. 둘째, 죽은 사람과 그리움의 대상에게는 나비문양이
무지개 색에 따라서 매일 바뀌는게 7일간 지속되고 사라진다는 점. 셋째, 문양이 사라지기
전에 대가 혹은 제물을 바치지 않으면 죽은 자는 다시 사라진다는 점. 이정도야. 넌 파란색
이니 슬슬 위험한데?”
형의 말에 얼굴에 핏기가 가시는걸 느꼈다. 소영이 다시 사라진다니. 그럴 순 없었다. 어째
서 그런걸 나에게 숨긴 걸까? 어서 돌아가 묻고 싶었지만 아직 물어볼 것이 남아있었다.
“대가…는 뭐죠?”
“모르지. 사람마다 다른 것 같다니깐. 내 경우는 노코멘트. 직접 네 칠일접에게 물어봐.”
그렇게 말한 정우 형은 하려던 얘기는 다음에 하자며, 더 급한게 있지 않냐고 내가 일어서
길 재촉했다. 나도 이야기를 나눌 여유같은건 없었기에 서둘러 커피숍을 나왔다.
나는 망설이고 있었다. 자취방으로 돌아오는 길에 머리가 식어감에 따라 혹시 내가 틀린 것
은 아닐까 하는 망설임이 생긴 것이다. 정우형의 말이 확실한 것도 아닌데 그걸 믿고 막무
가내로 소영이를 몰아쳤다가 소영이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은 아닐지 불안감이 생겼다. 하지
만 소영이의 미심쩍은 언동과 그를 뒷받침하는 정우형의 말 또한 믿지 않을 수도 없게 만들
고 있었다. 고민으로 머릿속이 가득한 채로 내 맞은편 벽에 쪼그려 앉은 소영이를 바라보았
다. 내가 돌아왔을 때부터 별다른 말없이 조용히 뭔가를 만들고 있었다. 붉은색 털실로 만
드는 무언가.
‘목도리인가?’
침묵만이 싸늘하게 우리 사이에 가로놓여 있었다.
결국 다음날 출근까지 나는 아무 것도 묻지 못했다.
일하는 내내 정우형의 말과 소영이가 했던 불길한 말들이 머리 속을 맴돌며 떠나지 않았다.
솔직히 당장이라도 돌아가서 묻고 싶은걸 참느라 고생했다. 게다가 나를 더욱 심난하게 만
드는 것이 있었다. 내 왼손 손등의 나비무늬였다. 이제는 남색이 되어버린 나비무늬가 시야
에 들어올 때마다 정우형의 말이 머리를 스쳐 더욱 괴롭게 했다. 그리고 초조감에 온몸이
들썩거렸다. 만약 정우형의 말이 사실이라면? 소영이가 사라진다면? 난 어쩌면 좋지? 불안
감이 가슴을 좀먹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전혀 해소되지 못한 채 자취방에 돌아왔다.
소영이는 여전히 앨범과 털실뭉치를 품에 안은 채 뜨개질을 하고 있었다. 어제와는 눈에 띄
게 달라진 완성도의 목도리였다. 조금 지나치게 긴 감이 없잖아 있는 새빨간 목도리는 지금
도 계속 길어지고 있는 차였다. 그리고 그와 함께 우리 사이의 불편한 침묵도 길어지고 있
었다. 하지만 결국 참지 못하게 된 나는 먼저 입을 열었다.
“소영아.”
“…응?”
흠칫 놀라며 눈을 들어 날 바라보는 소영이는 뜨개질하는 손을 멈추지 않은 채 대답해왔다.
그런 그녀에게 가슴 속에 품고 있던 질문을 했다.
“칠일접…이라고 했지? 대가가 뭐야?”
핵심이며 가장 중요한 질문이었다. 그리고 질문을 듣는 순간, 그동안 쉬지 않고 움직이던
소영의 손이 굳어지듯 멈추었다. 그리고 경악한 표정으로 크게 눈을 떴다. 그 반응을 보고
나는 확신했다. 정우형의 말은 사실이었음을. 그리고 긴 침묵이 이어졌다.
얼마나 침묵이 이어졌을까? 갈라진 목소리로 소영이가 입을 열었다.
“…어떻게?”
아마도 어떻게 안건가 묻는 것일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나는 강하게
다그쳤다 소영이에게 미움 받더라도 그녀가 사라지게 놔둘 순 없었다.
“그게 중요한게 아니잖아! 대가가 뭐냐니깐!”
나의 절박한 추궁에 소영이는 한참을 침묵했다.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그
리고 긴 침묵 끝에 소영이는 작게 입을 열었다.
“…타인의 생명.”
“뭐…?”
“타인의 생명이라고 말했어.”
“누가?!”
“악마. 붉은 옷의 악마와 계약했을 때, 내 혼을 담보로 재회하고 대가는 이 칼로 타인의 생
명을 빼앗을 것.”
그렇게 말하며 소영은 품 안에서 자그마한 칼을 꺼내었다. 사람을 죽이기 위한 칼이라고 생
각하기 힘든 순백의 나이프. 날마저 삼킨 하얀 빛은 칼이라는 실감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형광등의 불빛이 칼끝을 튕기는 순간 그것이 분명히 살인을 위한 흉기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깐… 살인을?”
“…응.”
작게 끄덕이는 소영이를 보며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소영이는 이런 중요한 일을 왜 내게 알
리지 않았을까? 날 믿지 못해서? 내가 사람을 죽이는게 싫어서?
‘아냐, 아냐. 그런게 아니야!’
내 안의 나를 다그친다. 소영이가 숨긴 것은 그 이전의 문제다. 내가 아는 소영이는 그런
애가 아니다. 처음부터 살인같은건 생각도 하지 않았을게 틀림없다. 자신의 혼을 담보로 걸
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 이유는 아마도 ‘날 다시 한 번 만나기 위해서’
눈물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그 바보 같음에 화가 났다. 동시에 그 불안감을 눈치 채지
못한 나에게도 화가 났다. 알아챌 수 있는 순간은 분명히 있었다. 내가 알아채지 못했을 뿐
이었다. 또다시 소영이를 잃고 싶진 않다.
“칼 줘.”
“…싫어.”
“칼 줘! 난 더 이상 널 잃고 싶지 않다고!”
내 고함에 소영이가 몸을 웅크리며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말했다.
“하룻밤만 생각할 시간을 줘….”
“안 돼.”
이미 마지막 날이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망설일 시간은 없는데 소영이는 계속 고집을 피
웠다.
“제발….”
눈을 마주보며 간절히 부탁해오는 눈빛. 치사하다. 꼭 이런 때만 이런 표정을 지어서 거절
할 수 없게 만든다. 깊은 한숨을 토하며 대답했다.
“아침엔 꼭…받아낼거야.”
그렇게 말하며 몸을 돌려 소영이와는 반대방향으로 드러누웠다. 내 마음을 굳게 다졌다. 소
영이를 다시 잃을 수는 없다. 오늘 밤은 그저 유예기간일 뿐이다.
마지막 날이 되었다. 손 등의 나비는 어제까지와는 확연히 다른 무늬로 변해있었다. 어제까
지는 단순히 커다란 나비 한 마리가 색만 변해가더니, 7일째인 오늘이 되어서는 작은 보라
색 나비 7마리가 사방으로 흩어져 날아가는 무늬가 되어있었다. 노골적으로 불안감을 불러
일으키는 변화였다. 난 스스로의 불안감을 가슴 속에 억누르며 거리를 헤매고 있었다.
아침에 약간의 실랑이가 있었지만 소영이는 결국 칼을 내밀었다. 그것을 내가 품 안에 갈무
리 해 넣고 집을 나섰다. 그런 나에게 소영이의 배웅은 없었다. 그리고 오후 늦은 시간인
지금까지 나는 거리를 헤메고 있었다.
‘제기랄!’
속으로 욕을 내뱉어 보았지만 초조감은 깊어져만 갔다. 혹독한 추위에 보이는 사람도 없고
거리는 고요에 휩싸여 있었다. 살인을 저지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뒤늦게 고개를 쳐들었
다. 홀로 있는 사람을 보더라도 누군가 보고 있는 것은 아닐지, 실패해서 상대가 도망가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떠올라 실행에 옮길 수가 없었다. 실패해서 경찰에게 체포되기라도 하
면 무엇도 되지 못한다. 그렇게 속삭이는 신중함을 가장한 겁이 가슴 속에서 혀를 날름거렸
다. 소영이에 대한 내 마음이 그 정도 밖에 되지 않았나 하는 자괴감이 가슴을 쥐어뜯었다.
하지만 시간은 무심히 흘러갔다.
배에서 들리는 꼬르륵 소리에 문득 정신이 들었다. 절망과 자괴감의 루프에서 나를 끌어낸
게 배고픔이라니 내가 너무나도 한심했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미 주변은 어둑어
둑해져 있었다. 그리고 저녁 무렵에 접어든 공원은 한층 더 어둠과 침묵에 무겁게 감겨있었
다. 소영이를 잃으면 나는 또다시 이러한 세상에 남겨지는 것일까? 사무치는 한기와 고독감
이 가슴 깊은 곳까지 가시가 되어 박히는 것 같았다. 자신의 한심함에 눈물마저 날 것만 같
았다.
그리고 그 때 맞은편 벤치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눈치 챘다. 아무렇게나 겹쳐 입은 지저분
한 누더기와 벤치그늘에 쌓인 술병들, 그리고 내팽개쳐진 모포. 세상모르게 잠들어있는 노
숙자였다. 하나둘쯤 사라져도 아무도 모를 사람들. 거기에 인적 없고 도로와 주택가로부터
멀리 떨어진 공원 깊은 곳.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살인을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마치 나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라는 듯이 펼쳐진 기회였다. 마른 침을 삼키며 품에서 나이
프를 꺼내들었다.
‘이 사람만 죽이면…!’
집에 있을 소영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를 지키겠다는 각오를 다시 한 번 새겼다. 그녀
를 잃고 싶지 않았다. 이 나이프를 내 앞에 세상모르게 잠들어 있는 남자에게 찔러 넣기만
하면 소영이는 사라지지 않는다.
초조감, 각오, 불안, 공포, 온갖 감정을 담아 나이프를 두 손으로 쥐고…
내리찍었다.
“하, 하하….”
헛웃음이 입에서 새어나왔다.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은 채로 메마른 겨울 밤하늘을 올려다보
았다. 모든 것이 끝났다. 나이프를 든 오른손을 눈앞으로 들어올렸다.
새하얀 날이다. 그것은 내 실패를 상징하고 있었다. 나는 결국 사람을 죽이지 못한 것이다.
가슴까지 불과 몇 센티를 남겨두고 나는 더 이상 손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사내는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자기 가슴에 드리워진 칼날에 비명을 지르며 나를 밀쳐내고는 도망갔
다. 그리고 벤치에서 굴러 떨어지듯이 일어나 도망치는 사내의 발에 걸려 술병 몇 개가 산
산조각 나는 것을 나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잠든 노숙자, 인생의 패배자를 찌르기만 하면 되는데, 나는 그것조차 하지 못했다. 겁이 난
것일까? 나도 잘 모르겠다. 확실한 것은 내가 믿을 수 없을 만큼 한심하며, 몇 번이고 기회
를 주어도 실패할 것이란 사실이었다.
‘어째서일까…?’
자책감이 가슴에 차올랐다. 소영이가 보고 싶었다. 하지만 소영이를 볼 낯이 없었다.
또각또각
낮은 굽소리가 들려왔다. 멍하니 고개를 돌렸다. 환상인가 생각했다. 소영이가 우는 것 같기
도 하고 웃는 것도 같은 표정으로 오고 있었다?
‘내 방에 있을 줄 알았는데….’
나의 한심한 모습을 본걸까? 그렇게 윽박지르고 큰소리친 주제에 실패하고만 멍청한 모습
을…. 목이 매여 말이 나오질 않았다. 하지만 애써 쥐어짜듯이 목소리를 내어 말했다.
“…미안해.”
나의 염치없는 사과에 소영이는 말없이 목에 두르고 있던 긴 빨간 목도리를 풀어 내 목에
둘렀다. 며칠간 계속해서 짜고 있던 목도리였다. 그리고 그녀가 말했다.
“괜찮아. 난 일우의 그런 착한 부분까지 좋아했으니깐!”
아니다. 난 착한게 아니라 겁이 많을 뿐이다. 난 비겁하다. 소영이가 잘못알고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지만 소영이는 검지로 내 입을 막으며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말보다 다른 얘기를 하자. 아직 못 다한 얘기가 많잖아.”
그 상냥함에 눈물이 쏟아졌다. 소영이는 요번에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내 눈물을 닦아주었
다. 우리는 5일전 그러했듯이 둘만의 추억을 되새겼다.
이야기의 샘은 마를 줄을 몰라서 몇 시간이 꿈과 같이 흘러갔다. 이야기를 하다가 문득 시
간을 깨달았을 때에는 이별의 시간이 다가와 있었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아직도 산더미같이 남아있는데 시간은 야속하리만치 무심히 흘러갔다.
소영이도 공원의 시계를 보고 그 사실을 눈치 챘는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우리의 사이에
고요가 맴돌았다.
“이별할…시간이네?”
소영이가 입을 열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마지막 부탁이 있어.”
“부탁?”
내가 되묻자 소영이는 수줍게 웃었다.
“마지막으로 키스해주라.”
“응….”
추위와 부끄러움으로 얼굴이 발갛게 상기된 소영이가 눈을 감았다. 내 얼굴도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나도 살며시 눈을 감고선 소영이에게 얼굴을 가까이했다. 내 입술이 소영이
에게 가까워지고 그녀의 숨결이 느껴졌다.
이윽고 내 입술이 소영이의 입술에 맞닿았다.
부드러운 감촉이 입술에 스치듯 닿았다가 신기루처럼 떨어졌다.
“헤헷.”
눈을 뜨자 소영이는 뒷걸음질로 두 발짝 물러섰다. 그리고 작게 웃어보였다. 그 작은 미소
에 나는 이별을 예감했다.
“우일아.”
“….”
“안녕.”
마지막 작별인사와 함께 작은 빛무리를 남기고 소영이는 사라졌다. 그리고 남은 빛무리마저
이윽고 꿈과 같이 허공에 녹아들어 사라졌다.
소영이는 이제…없다.
난 내가 울고 있음을 깨달았다.
요번엔 내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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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후는 사족? 밑에도 읽는 것은 자유. 오히려 재미가 떨어질지도 모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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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발이 얼어붙는 것을 느끼며 나는 공원 한복판에 멍하니 주저앉아 있었다.
손등에는 더 이상 나비무늬가 남아있지 않았다. 그리고 소영이 또한 내 곁에 있지 않았다.
살아있는 실감이 나지 않았다.
‘난 어떻게 하면 좋을까?’
스스로에게 묻지만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런 내 시야에 한 쪽에 내팽개쳐져있는 새하얀 나
이프가 보였다. 무언가에 홀린 듯 한 기분이 들었다. 나도 그녀에겐 타인. 어차피 소영이 없
인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내 생명이라도 상관없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
프를 집어 드는 손에 망설임은 없었다.
‘제발 소영이는 돌려주세요.’
누구에게 하는 애원인지는 나도 모른다. 하지만 간절한 소원을 빌며 나는 내 심장을 향해
나이프를 찔러 넣었다.
가슴을 꿰뚫는 화끈한 고통. 내 생명이 상처를 통해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고 내 몸이 뒤로
기우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쿵 하는 느낌과 함께 내 의식이 어둠으로 물들어갔다.
꺼져가는 시야 한편에 빨간 옷자락이 보인 듯 한 기분이 들었다.
눈이 내리기 시작한 어두운 공원. 그 한복판의 공터에 한 남자가 쓰러져있다. 하늘을 바라
보고 잠들듯 쓰러진 사내의 가슴엔 작은 칼 한 자루가 꽂혀있었다. 마치 피를 먹은 듯 새빨
간 나이프였다.
그때, 허공에 작은 빛무리가 생겨나 모여들더니 한 소녀가 나타났다. 붉은색 옷을 입은 산
타를 연상시키는 소녀-소영이었다. 무게감 없이 눈처럼 사뿐히 땅에 내려선 소영이는 울음
을 억지로 참느라 일그러진 얼굴로 몸을 떨며 쓰러진 남자-일우에게로 걸어갔다. 이미 숨이
끊어진 일우의 몸은 싸늘히 식어가고 있었다.
일우의 시신을 말없이 내려다보던 소영은 일우의 머리맡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 그
의 머리를 받쳐 들어 자신의 허벅지에 올려놓았다. 그 후, 잠들 듯 평온히 눈을 감은 그의
얼굴을 몸을 숙여 내려다보았다.
뚝뚝
더 이상 참지 못한 소영의 눈에서 한방울 두방울 눈물이 떨어져내려 일우의 얼굴을 적셨다.
하지만 일우의 감긴 눈꺼풀은 조금의 떨림조차 없었다. 소영은 소리죽여 오열했다.
“흑…흑…바보. …바보야….”
소영과 일우의 얼굴은 그녀가 흘린 눈물로 범벅이 되었다. 그리고 하늘에서 내린 하얀 눈은
두 사람의 몸을 조용히 덮어나갔다.
소영은 조용히 일우의 목에 감겨져있는 목도리를 반만 풀어내었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목에 둘렀다. 어차피 이별을 각오했기에 같이 감을 일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무의식적으로
길게 짜버린 목도리를, 이런 식으로 함께 감게 될 줄은 그녀도 몰랐다. 그녀는 이 모든게
자신 때문임을 알고 흘러넘치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조용히 손을 뻗었다. 그
의 가슴에서 뽑아든 나이프가 그녀의 손에 쥐여졌다.
푹
작은 소리가 공원의 고요한 대기 사이로 흩어지고 공원은 다시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하얀
눈만이 어둠을 밝히며 내려 두 사람의 위에 쌓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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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후는 진짜 사족. 안 읽는게 나을지도 모름. 밝혀지는 비밀따윈 없음. 오히려 재미가 떨
어질지도 모름. 에필로그 같은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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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자의 기척이 남지 않은 공원에 한 사내가 나타났다. 박정우라는 이름의 껍질을 쓴
이질적인 존재였다. 안개 같은 기척이 그의 진면목을 파악할 수 없게 만들고 있었다. 외형
은 박정우라는 인간이지만 그것은 그런 인간이 아닌 붉은 옷의 악마라는 자였다. 때로는 나
비의 백작이라고도 불리는 죽음에 이르는 병-절망의 수집자였다. 그는 매우 만족스러운 웃
음을 지으며 눈앞의 두 사람을 내려다보았다.
무릎베개를 해주고 입맞춤을 하려는 듯 한 자세의 연인.
여자가 늘어뜨린 긴 생머리에 가려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그림과도 같이 아름다운 연인의
모습이었다.
‘산타가 꼭 착하란 법은 없지. 난 산타도 아니지만.’
“좀 손이 많이 가긴 했지만, 기대이상의 결과가 나왔군.”
만족한 듯 중얼거리며 악마는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소영의 심장에 박혀있던 피에 물든 나
이프가 뽑혀 그의 품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두 사람의 가슴에 새겨진 상처 또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당장이라도 살아날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이제 기념품을 챙겨볼까?”
중얼거린 그는 양손을 펼쳤다. 그러자 그의 손에 일우의 방에 있을 앨범과 함께 카메라가
나타났다. 그는 카메라에 두 사람의 마지막 모습을 담았다. 그러자 카메라는 빛을 발하며
한 장의 사진으로 변화하였다. 사진에는 눈 오는 공원에서 마지막을 맞은 연인-일우와 소영
의 모습을 아름답게 담고 있었다. 자신의 사진에 만족한 그는 앨범의 마지막 비어있는 한
장에 꽂아 장식하고는 그의 빨간 정장의 품안에 넣고 손가락을 튀겼다.
딱
작은 소리와 함께 악마는 허공으로 녹아들 듯 사라졌다.
# by | 2009/12/31 21:02 | 허상 이야기(자작소설) | 트랙백 | 덧글(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