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S물]반 쪽의 스피카-2

온 몸에 한꺼풀 검은 필름이 씌어진 느낌이었습니다. 온 세상이 그 광채를 잃고 희미한 어
둠 속에 잠겨있으며, 저는 꿈속을 거닐듯이 그러한 세상을 방황하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그 어느것도 모호하게만 느껴져 실감이 나지 않아, 스스로 뺨을 꼬집어 현실을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그게 너무 무서웠습니다. 반신을 잃은 것만으로 이러한
세상에 내팽겨쳐졌다는 사실보다, 영원히 잠든 누이는 이보다 더욱 가혹하고 무서운 세계에
홀로 떨어졌을지도 모르는 것이 제게는 더욱 큰 공포였습니다. 어째서 제가 아니라 동생이
그렇게 되어야 했는지 납득할 수 없었습니다. 동생이 절 감싼 것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이해하길 거부했습니다. 대신 저는....


‘난...뭘 하고 있는 걸까?’

빈소에 앉아 멍하니 영정사진들을 바라보며 시인은 생각했다. 평소처럼 멍한 머리와 가슴이
사진을 보며 요란스럽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시인이 바라보고 있는 사진은 시
인 자신의 사진이었기 때문이었다. 부모님의 영정과 나란히 놓인 자신의 사진에 시인은 복
잡미묘한 심정도 가질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 원인이 시연에게 있었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계속 머리를 맴도는 의문에도 시인은 그것을 외면하며 멍하니 영정을 바라볼 뿐이었다.

빈소를 찾는 조문객들 또한 그런 시인의 분위기에 차마 말을 걸지 못하고 조용히 조문만 하
고는 빈소를 빠져나갔다. 간혹 찾아오는 요란한 조문객, 특히 시인 부모님의 옛제자들조차
시인에게는 말을 걸지 못했다. 그만큼 하얀 소복을 입은 시인의 모습은 살포시 쌓인 눈이나
새하얗게 타버린 잿더미 같아, 건드리기만해도 푸석하는 희미한 소리와 함께 공기 중에 흩
어져 내릴 것만 같았다. 덕분에 시인의 고민은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방해없이 쭉 이어졌다.

늦은 밤, 조문객의 발길이 끊어졌음에도 시인은 시간의 흐름을 잊은 듯이 앉아 있었다. 동
생의 모습을 끊임없이 되새기며 혹여라도 그 흔적을 하나라도 잃을 새라 필사적이던 시인은
또다시 조문객이 한 명 더 온 것을 겨우 눈치챘다. 고개를 숙인 탓에 양말신은 발만이 보이
던 조문객은 곧은 발걸음으로 정중하게 영정에 절을 했다. 어쩐지 감정이 절제라기보다 결
여된 듯한 느낌을 주는 동작이었다. 그리고 그 발걸음의 주인은 전혀 거리끼는 느낌 없이
시인의 앞에 와 섰다.

“가인양?”

‘...아, 날 부르는 거지.’

멍하니 있던 시인은 뒤늦게 그것이 자신을 부르는 것임을 깨닫고 완만한 동작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상대의 모습을 확인했다. 채 서른살이 되보이지 않는 젊은 남자였다. 물론
서른은 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시인은 동안이라고 생각했던 사내였다. 초등학교 졸업
할 즈음부터 중학교 졸업 전까지 줄곧 만나왔던 익숙한 정신과 의사였다. 아버지를 은사라
칭하며 정신과를 포함해 다양하게 남매와 마주했지만 근 반년 이상을 본 적이 없던 인물이
시인의 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하지만 그가 은사의 장례식에 나타난 것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었기에, 시인은 침마저 말라붙은 입을 열어 대답했다.
“안녕하세요. 동해선생님....”
가인과 너무나도 닮아서 약간 높게 발음하는 것만으로도 완벽하게 연기하며 시인은 힘없는
눈을 동해와 마주쳤다. 그리고 자신의 앞에서 감정없이 미소짓고 있는 사내가 얼른 사라져
주길 원했다. 예전부터 마치 다 알고 있다는 듯이 꿰뚫어보는 사내가 시인은 껄끄러웠다.
“힘들겠군요.”
침묵으로 답하는 시인을 동해는 안쓰럽게 쳐다보았다. 동해로서도 인연이 적지 않은 인물들
의 참혹한 사고에 마음이 쓰라린 눈치였다. 단지 은사의 자식이란 이유만으로 돈도 되지 않
는 일을 몇 년간 해온 인물에게 시인은 고마움도 한켠으로 느끼고 있었기에 껄끄러워도 함
부로 대할 수는 없었다. 그저 들었던 시선을 다시 내림으로써 소극적으로 접근을 막을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도애에게는 그 의사가 전해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는 양복이 구겨지
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시인의 곁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당분간 일어나지 않을 심산
이었다.
“아무도 없군요.”
자기보다 열 살 이상 어린. 아니, 제 나이의 거의 절반 뻘인 시인에게도 존댓말을 쓰는 기
묘한 사내는 텅 빈 빈소를 보며 그대로의 감상을 말했다. 실제로 밤이 되어 몇 안되는 친척
과 부모님의 옛제자들도 돌아간 후였다. 반쯤은 시인이 내보낸 것이나 마찬가지였지만 말이
다. 그런 한밤중에 찾아온 동해가 이상한 것이었다. 하지만 시인은 굳이 그런 것을 말하지
않고 침묵했다. 동해도 제풀에 지쳐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제 어쩔 생각이죠?”
“...네?”
갑자기 던져온 예상 외의 질문에 시인은 동해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동해의 날카로운 눈빛
에 압도되었다. 언제나의 느긋한 듯한 눈매가 칼날처럼 날카롭게 솟아올라 마음을 낯낯히
해부하는 듯한 감각이 시인을 괴롭혔다. 단지 눈빛 하나만으로 빈소의 가라앉은 공기가 달
아오른 칼날처럼 피부를 저며오는 듯 했다. 이런 눈빛은 생전 처음이라 시인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것인지 묻고있는겁니다.”
“...돌아가신 부모님하고 오빠 생각이죠.”
애써 태연을 가장하며 자못 슬프다는 것을 표현했지만 목소리가 떨려오는 것을 멈출 수 없
었다. 그래도 지극히 보통의 대답을 애써 목소리로 자아내서 대답했다. 그런 시인을 보며
동해는 한숨을 몰아쉬고는 다시 입을 열어 치명적인 말의 비수를 벼려내었다.
“제가 묻고싶은 말은 자신의 장례식을 하는 이유예요. 시인군.”
그 말이 치명적인 일격이었다. 시인은 그 말에 평정심을 잃고 허둥대기 시작했다. 때문에
대답하는 것이 늦어져 동해의 생각에 확신을 실어주었다.
“무...무슨 말이세요? 전 가인이라구요.”
“아뇨. 방금 전에 확신했어요. 시인군, 왜 가인양의 행세를 하는 거죠?”
이미 확신하고 있는 동해의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시인은 동해의 이상하리만치 투명한 눈
빛에 압도되는 자신을 발견했다. 언제나 그래왔듯이 이 사내는 모든 것을 꿰뚫어보는 분위
기를 풍기며 다른 사람의 내면에 아무렇지도 않게 파고들어 비밀을 캐냈다. 저도 모르게 사
내에게 휘말려 말을 섞게된 시점에서 틀렸을 지도 모른다. 덕분에 이 연극은 생각 이상으로
일찍 끝나버리게 된 것 같았다.
‘연극...인가.’
자신을 포기하고-죽이고- 동생으로서 살아가고자 했지만, 동생을 ‘연기’한다고 생각한 시점
에서 잘못된 것일지도 몰랐다. 동생 그 자체가 되었어야했고, 자신이 곧 가인이였음에도 마
지막이 된 순간 동생과 자신을 구분지어 버린 것 같았다.
“이곳에 오기 전부터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지만 역시였군요. 비정상적으로 변질된 자기애와
동일화, 텔레파시를 보이던 남매가 평범하게 자기의 반신이나 마찬가지인 남매의 죽음을 받
아들일리 없다고 생각은 했지만....”
“언제부터 아셨죠?”
“처음 본 순간엔 긴가민가였지만 말을 한 순간 이미 9할 이상 확신했죠. 전 시인군 남매에
대한 모든걸 알고 있습니다. 착각하기도 쉽지 않아요. 애초에 두 사람의 상태를 치료할 수
도, 치료할 생각도 없이 방치하고 관찰한게 몇 년인걸요.”
그렇게 말하며 씨익 웃는 동해에게 시인은 불쾌한 공포를 느꼈다. 그 미소가 어째서인지 이
해할 수 없는 초현실 적인 것으로 느껴졌다. 그 미소가 곤충의 미소같고, 그 감정없는 눈이
무기질의 카메라렌즈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동해는 그런 기색은 순식간에 피부 밑으로 눈
녹듯이 스며들게 하고는 평범하게 걱정하는 표정으로 돌아왔다.
“이제 어쩔 생각이죠? 이런건 좋지 않아요.”
당연한 얘기였다. 언제까지고 속일 수도 없으며 이렇게 쌓아가는 거짓은 계속 곪아나가 언
젠가는 터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돌이킬 수 없는 치명상이 될 것이 뻔했다. 이런다고 죽은
가인이 돌아오는 것은 아니었다. 그 사실은 시인 또한 전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매일 눈을
뜰 때부터 잠들 때까지, 숨 쉬듯 느껴지는 상실감은 갈증처럼 시인을 괴롭히고 있었다. 하
지만 시인은 이것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저 피가 나도록 입술을 질끈 깨물을 뿐이었다.
그것을 보는 동해의 눈이 부드럽게 변했다.
“포기할 수 없나보군요. 어쩔 수 없죠.”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난 동해는 엉덩이를 툭툴 털고 지갑에서 명함을 한 장 꺼내어
내밀었다.
“곰곰히 생각해보고 그래도 정 하겠다면, 완벽해지도록 도와줄게요.”
그렇게 말하며 명함은 자신의 애인의 것이고, 그 애인이 운영하는 병원은 비록 불법이지만
실력 하나는 좋다며 언질을 해두겠다고 말했다. 마음을 정하고 각오가 선다면 가보라는 말
도 덧붙였다. 의사로서는 실격인 행동이었지만, 평범하지 않은 가치관을 가진 그였기에 가
능한 행동이었다. 더불어 그가 시인남매에게 가지는 호의는 그만큼 크고 깊은 것이었다.
동해마저 돌아가 빈소에 홀로 남겨진 시인은 명함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깊은 생각에 빠져들
었다.

by 월신초 | 2009/10/28 16:09 | 허상 이야기(자작소설) | 트랙백 | 덧글(0)

[TS물]반 쪽의 스피카-1

쌍둥이 동생이 있었습니다. 비록 이란성이지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닮은 남매였습니다. 비
록 저는 남자. 동생은 여자라는 차이가 있었지만 성별의 차이정도는 아무것도 아닐 정도로
우리는 마치 한 몸과 같았습니다. 아니, 한몸이었습니다. 제가 웃으면 함께 웃어주는 것이
아니라 제가 웃을 때 웃고, 제가 울면 함께 슬퍼해주는 것이 아니라 제가 울 때 울었습니
다. 마치 신의 착오로 한 몸으로 태어나야 할 것을 둘로 나뉘어 태어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로 저희는 닮았었습니다. 붙어다닐수록 저희는 서로를 타인으로 인식하지
못 할 정도였습니다. 물론 각자의 생각도 있고 서로 다른 인물이라는 것도 알고있었으니 착
각을 해도 금방 바로잡았지만요.
부모님은 이런 우리들을 걱정하셨는지 중학교에 입학하게 되자 서로 다른 학교로 입학시키
시고는 함께 다니는 것을 막으셨습니다. 저희도 주변의 생각을 그때쯤 어렴풋이 눈치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때부터 저희는 겉으로나마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행동하기 시작했으
니까요. 덕분에 저희에 대한 의심은 곧 거두어졌습니다. 하지만 서로 멀리 있다고 해도, 서
로 다른 것을 보고 듣고 만진다해도 저희의 사이엔 거리란 존재하지 않는거나 마찬가지였습
니다. 제가동생의 모든 것을 느끼듯, 동생도 저의 모든 것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서로 마음
속 깊이까지 알고 있었으니까요. 저희의 사이에는 오로지 진심만이 존재했습니다. 거짓 따
위가 존재할 수 없었던겁니다.
그렇게 하루가 가고, 한주가, 한달이, 일년이, 이년이... 시간이 흐르고 흘러 고등학교에 입
학했습니다. 그리고 저희는 다시 온전한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동생은
저이자 저의 반신이며, 그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존재였습니다. 서로 말로 확인하지 않았지
만 전혀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렇게 1학기가 끝나고 여름방학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저의 반신을 잃었습니다. 아니,
저의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동생과 나를 연결하고 있던 보이지 않는 실을 통해 공포, 고통,
절망, 그리고...소망. 그것을 남기고 동생은 이 세상에 저만을 남기고 사라졌습니다. 영원히
깨어나지 못할 잠에 빠진 것입니다. ...아닙니다. 잘못 말했습니다. 영원히 잠든 것은....

 

“으....”
온몸에 느껴지는 아픔에 시인은 눈을 뜨려 노력했다. 하지만 눈은 접착제로 붙이기라도 한
듯이 천근만근 무거워 도저히 뜰 수가 없었다. 물 먹은 솜처럼 무거운 몸은 힘이 들어가지
않고, 가슴과 등은 쪼개지는 듯한 아픔으로 움직이는 것을 거부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있어선 안되리라는 강박감이 시인을 재촉하고 있었다. 초조한 가슴을 가득 매우고 흘러넘쳐
서 참을 수 없었다. 시인은 온 힘을 끌어모아 겨우 눈을 떳다.
“헉.”
순간 숨을 삼켰다. 코 앞에 낯선 얼굴이 시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곧
깨달았다. 그 얼굴은 시인이 언제나 바라봐온 너무나도 익숙한 얼굴이었다. 단지 피범벅이
되었다는 점만이 다를 뿐이었다. 그리고 언제나 광채를 띄고 있던 눈빛은 그 광채를 잃고
공허하게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랬다. 시인의 몸을 억누르고 있던 것은 동생의 몸이었다.
시인은 힘을 끌어모아 손을 들어올렸다. 동생을 살피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들어올리던 손
을 제지하듯 억센 힘에 붙잡혔다. 시인은 눈을 돌려 자신의 손을 붙잡은 손을 보았다. 그건
동생의 손이었다. 동생의 섬세하고 가느다랗던 손도 지금은 핏기가 없이 창백해 금방이라도
바스라져 사라질 것만 같았다.
“...가...인아....”
시인은 쇳가루라도 삼킨 듯이 갈라진 목소리로 애써 동생의 이름을 불렀다. 동생에게 잡힌
손으로 끊어질 듯 희미하게 동생의 감정이 흘러들어왔다. 공포, 고통, 절망, 그 모든 것이
뒤섞여 가슴을 진탕으로 만들고, 가슴의 고통을 배가시켰다. 시인은 그 모든 고통이 자신의
것인지 동생의 것인지조차 구분할 수 없었다. 그저 그를 비추지 못하는, 동생의 초점 잃은
눈만이 시인의 눈에 들어올 뿐이었다.
“...오빠...우웩!”
이상할 정도로 또렷한 목소리가 가인의 입에서 흘러나와 시인의 귀를 파고들었다. 그리고
터져나온 선명한 붉은색 피가 시인의 가슴을 흥건히 적셨다. 시인은 타는 듯한 뜨거움을 느
끼며 꼼짝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가인의 오른손이 자신의 뒤로 뻗어지는 것도 눈치채지 못
했다.
딸깍
거친 기계장치의 소리가 들리고 뒤에서 삐걱거리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시인은 등
을 지탱하던 힘이 사라지자 몸이 기울어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여전히 몸은 움직이지 않
았다. 이래선 안된다는 것을 시인은 알고 있었다. 필사적으로 소리치려 했지만 목이 매여
소리칠 수 없었다. 그런 시인을 가인은 마지막 힘을 다해 밀쳐 차 밖으로 떨어뜨렸다. 그리
고 도로에 나뒹구는 시인을 향해 이미 보이지 않게 된 눈을 마주쳤다.
‘아- 오빠 얼굴이 안 보이네...마지막으로 보고싶었는데.’
그렇게 생각하며 가인은 자신을 멍하니 올려다보는 시인을 향해 입을 달싹였다. 사랑하는
오빠에게 전하는, 자신의 소망을 담은 마지막 한마디였다.
“오빠, 살....”
말은 미처 끝마쳐지지 못하고 자ㅈ아들었다. 하지만 둘 사이에 연결된 실은 시인에게 그 들리
지 않은 뒷부분까지 고스란히 전해주었다. 동생이 간절히 원한 마지막 소망. 그것은 꼭 살
아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시인은 가인의 가슴을 찢고 드러나있는 붉은 색의 돌기
를 눈치챘다. 날카롭게 찢겨진 차체의 파편이 피에 물든 채 가인의 연약한 몸을 뒤에서 꿰
뚫어 가슴에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시인은 이미 끊어진 실을 붙잡으려는 듯이, 축 늘어진
가인을 향해 허공에 손을 뻗었다. 하지만 시인의 손은 가인에게 닿지 못했다. 시인의 손을
피하듯이 차체가 뒤집어지며 솟구치더니 바닥에 가라앉듯 순식간에 시야의 밖으로 사라졌
다. 시인에겐 영겁과도 같은 잠시가 지난 후, 거센 폭음이 천지를 뒤흔들었다.
“가인...아?”
아무런 대답이 들리지 않았다. 거세게 타오르는 불길소리만이 조용히 어두운 밤길을 밝히고
있을 뿐이었다. 시인은 뻗고 있던 손을 힘없이 떨구었다. 주저앉은 자세로 동생이 사라져간
절벽 끄트머리만을 넋을 잃고 쳐다보았다. 언제까지 기다려도 사랑하는 동생의 대답은 어떻
게도 돌아오지 않았다. 단지 가슴 속에 맴도는 따스한 소망의 말만이 시인의 얼어붙은 몸과
마음 속에 작게 흔들리고 있을 뿐이었다.


이글루스 가든 - 소설가가 되고 싶습니다!.

by 월신초 | 2009/10/25 19:46 | 허상 이야기(자작소설) | 트랙백 | 덧글(0)

[나이트후드/슬라이서]늦 여름의 취재

나이트후드 크라이시스 / 슬라이서



나이트후드들이 실존하는 세계에서
느닷없이 연쇄 살인이 일어난다.
단, 그 살인마들이 도저히 특정이 지어지지 않는다.
연쇄 살인이라고 말하는 근거는 끔찍하게도 인간을 도륙하여
시신을 알아볼 수 없게 만들어 놓고 버려두고 간다는 것

몇몇의 용의자를 잡고, 그들로부터도 자백을 받아내었으나
이러한 범행은 계속해서 멈추지 않고
또 누군가에 의해서 계속해서 일이 저질러진다.
결국 불특정 다수에 의한 모방 범죄로 판단되는 이 엽기적인 살인사건을 일컬어
나이트후드들은 '슬라이서' 즉 채칼 살인마라고 일컫는다.
왜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고, 이러한 사건 덕분에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되는지

그 이야기를 끈적하게 써주면 되겠습니다.



시간은 지금부터 오늘 자정까지(09년 10월 22일)
1편을 꼽아
피자는 내일 점심 시간 때 쯤에 배달 시킬 예정입니다.


글을 올려주실 곳은 미르나라 자유연재 게시판으로
[나이트후드/슬라이서]라는 말머리를 달고 글을 올려주시면 됩니다.

http://mirrnara.com
입니다.


나이트후드 초심자를 위해 나이트후드에 대해 설명을 하자면
평범한 우리 사는 세상에. 여러가지 신비한 사건 혹은 위험한 범죄들 사이에서
그 것이 우리들이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기 위해 싸우는
후드티를 입은 정체불명의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단체인지, 개인인지도 알 수 없고
누가 소속되어 있는지도 모릅니다.

어떤 나이트후드는 초능력을 사용하고
어떤 나이트후드는 마법을 사용하고
어떤 나이트후드는 범죄자를 소탕하며
어떤 나이트후드는 미치광이 살인마 일수도 있습니다.

일상과 다른 세상에 맞닿아 있는 밤마다 움직이는 검은 후드티를 입은 사람들
그들이 바로 나이트후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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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일에 대해선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습니다. 비록 제가 그 일로 형사일을 더 이상 해나갈
자신을 잃어 이렇게 채소가게나 하고 있지만, 전혀 후회하지 않습니다. 지금도 그 일을 떠
올리기만 하면 온몸에 소름이 돋고 식은땀으로 세수를 할 지경입니다. 아니지, 그 날은 약
의 도움 없이는 도저히 잠들 수가 없을 지경입니다. 그래서 신문도 읽지 않고, TV와 라디
오조차 놓지 않고 있습니다. 제발 저를 가만히 놔둬주세요.

 


그게 얼마전, 전직형사였던 김씨를 간신히 찾아갔을 때 들었던 말이었다. 연쇄살인사이트
‘슬라이서’에 등록된 첫 사건의 관계자인 그는 몇 번의 방문에도 만나지 못하다가 간신히
만났을 때, 저런 대답을 하며 나를 가게 바깥으로 내쫓았다. 하지만 나는 포기할 생각은 추
호도 없었다. 비록 그가 관계된 당시에는 새까만 페이지에 이름도 없고 아무도 존재를 모르
는 사이트였지만, 지금은 초등학생조차 그 존재를 알고 공포에 떨게하는 사이트. 슬라이서
라는 이름으로 수없이 많은 미러사이트를 만들어 증식해 차단조차 통하지 않는 넷 상의 괴
물. 사건이 계속되고 그 기록이 쌓여갈수록 그 끔찍한 모습을 구석구석을 모자이크형식으로
장식하는 사이트의 정체를 파고들기 위해선, 그에게 이야기를 들어야만 했다.
비록 그 이후의 사건들에 대해서는 그는 거의 모르는 분위기지만 적어도 최초의 사건에 대
해서 만큼은 제대로 알고 있을테니 말이다. 사이트‘슬라이서’가 아닌 사건‘슬라이서’의 탄생
에 대해선 실마리를 얻을 수 있으리라 나는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서 이야기를 듣기 위해 방문한 것이 십여번. 수박파편이 애써 다듬은 머리카락
에 흘러내리거나, 마음에 들었던 원피스에 시든 무청이 장식으로 추가되는 수모를 겪으며
계속 거절당하니 슬슬 포기할까 하는 생각이 고개를 처들고 있었다. 그때였다, 그가 갑자기
나에게 전화를 걸어와 인터뷰에 응하기로 한 것은. 솔직히 그의 완고함에, 차라리 철저하게
비밀로 하고 있는 경찰의 뒤를 캐보는 것이 더 빠르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던 나는 치장하
는 것도 잊고 단숨에 장비를 챙겨 뛰어나갔다.
그의 가게에 도착했을 때, 그는 지금까지의 태도와는 다르게 정성들여 깎은 과일을 접시에
담아 차와 함께 준비해놓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에게선 기이한 권태감과 포기한 듯한
분위기마저 감돌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자리에 앉자마자 무엇이 그리 급한지 이야기를 시
작했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해야하나. 그렇지, 그건 제가 야간당직을 선 날이었습니다. 이른 봄이
라 밤공기가 싸늘했지만 사무실만큼은 온풍기 덕에 따뜻해서 금방이라도 잠들 것 같았죠.
잠이라도 깰까해서 사무실을 나오는데 마침 누군가가 들어오려 하고 있더군요. 누군가 했더
니 구내식당에 고기를 납품하는 정육점 아저씨였습니다. 몇 번인가 본 적이 있어서 알고 있
었죠. 언제나처럼 ‘이른 아침에 배달하느라 고생이십니다.’라고 인사를 하고는 궁금해서 물
어봤습니다.

“근데 여긴 어쩐일이십니까? 식당은 지하인데요.”
“예에. 안녕하십니까. 그야 물론 용건이 있어서 왔습니다아. 여기가 강력계 맞죠오?”
묘하게 느긋한 말투의 덩치 큰 중년의 사내는 김형사가 고개를 끄덕이자 사무실로 쑥 들어
와서 자연스럽게 사무실 한켠의 테이블 곁에 가 멈추었다. 김형사는 사내의 덩치에 눌려 미
처 제지하지 못하고 사내의 뒤를 쫓아갔다. 그는 매고 있던 커다란 비닐봉지를 원형테이블
에 거칠게 내려놓았다.
어지간히 무거운 물건인지 심하게 삐걱거리는 테이블을 보고, 김형사는 사내가 배달 중에
들른 것이라 판단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찾으시는 분이라도?”
“자수하러 왔습니다아.”
순간 김형사는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고 눈을 동그랗게 떳다. 갑자기 강력계에 찾아와
서 자수라니. 사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어서 다시 되물었다.
“예? 자수요?”
“그렇습니다아. 딸을 죽였거든요오.”
그렇게 말한 사내는 주머니에서 카세트를 꺼내 재생버튼을 눌렀다. 잠시간의 치직거림이 있
은 후 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아빠? 왜그래? 눈이 무서워.>
<꺄아아악! 아파! 아파!!>
<아빠. 그만! 아파. 제발...>
<아빠, 살려...줘...>
<말...잘 들을....끄르륵>

파육음.
피가 튀는 소리.
절규, 비명, 애원, 울음.
피 끓는 신음소리와 죽어가는 목소리.

사내의 목소리는 어디에도 녹음되 있지 않지만, 그것은 명백히 김 형사 앞에 서있는 사내가
한 짓이었다. 사내는 카세트를 멈춘 후, 할 말을 잃고 서 있는 김형사에게 흔들어 보이며
테이블에 내려 놓았다. 놀라울 정도로 담담한 표정으로 사내는 말을 이었다.
“음, 딸은 여기 있습니다.”
사내는 그렇게 말하고는 비닐봉지의 입구를 크게 펼쳐 김형사에게 보이도록 기울였다. 상황
을 파악한 듯 사내에게 달려들려던 김형사는 그 안을 보고 굳어졌다.
비닐봉지의 안에는 붉은 색 고기더미가 있었다. 냉동된 고기를 불고기감으로 썰기라도 한
듯이 얇고 넓적한 편육이 아무렇게나 섞여 무더기를 이루고 있었다. 뼈째로 자른 듯 사이사
이 하얀 부분이 섞인 얼어붙은 고기더미는 원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정육점에서 흔히
보는 썰어논 고기와 그다지 다를바 없었다. 단지 그 양이 좀 많을 뿐이었다.

대충 초등학생 한 명 분량정도.

“우웨에엑!!”
김형사는 그 정체를 인식한 순간 구토를 참지 못했다. 무릎을 꿇고 바닥에 격렬하게 토했
다. 사내는 곤란한 듯한 표정을 짓고는 다시 품에서 디카를 하나 꺼내 테이블에 올려놓고
돌아섰다.
“이런, 상태가 안 좋으신 것 같군요오. 카메라만 놓고 다음에 다시 오겠습니다아.”
“거기서! 우아아아!!”
김형사는 억지로 몸을 일으키며 총을 뽑아 사내를 겨누었다.
“이 악마!”
그리고 사내의 등을 쏘았다. 총소리가 울려 퍼지고 사내는 한 바퀴 핑 돌며 쓰러졌다. 붉은
피가 바닥을 따라 퍼져나갔다. 김형사는 아직도 울렁거리고 뒤틀리는 것 같은 배를 움켜쥐
며 입가를 닦았다. 그리고 몸을 숙이며 격하게 기침을 하고는, 쓰러져 꿈틀거리는 사내를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사내의 머리를 겨누며 방아쇠에 건 손가락에 힘을 싣는 순간, 방으
로 쏟아져 들어온 동료들에게 제지당한 채 끌려나갔다.

 

결국 그 놈은 죽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 일로 정직처분을 받았고, 그대로 아예 사표를 내버
렸습니다. 도저히 계속해나갈 자신이 없었거든요. 다시는 떠올리기도 싫었습니다. 자기 딸을
그렇게 처참한 모습으로 죽이다니! 그것도 이유없이 말입니다! 카메라에는 그자식이 자기
딸을 죽이고 해체하는 과정이 찍혀있었답니다. 죽이고 냉동시켜서 기계톱으로 고기썰듯이
써는 장면이요! 지금도 이해할 수 없고 하기도 싫습니다. 몸이 부들부들 떨려요!
후우- 얘기는 여기까지입니다. 돌아가 주세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는 내 등을 떠밀어 가게 바깥으로 내쫓았다. 문까지 걸어잠궈 거부하
는 그에게 더 이상 얘기를 들을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더 들을 얘기도 없어보였고 말이
다. 그래서 작업실로 돌아가기 위해 몸을 돌리는 순간 큰 폭음과 함께 내 몸이 허공을 나는
것을 느꼈다.

내가 병원에 누워있는 지금. 그는 사이트 ‘슬라이서’에 21번째 ‘슬라이서’이자 그 희생자로
등록되었다. 가스폭발로 죽은 그는 사체가 거의 형체도 남지 않았다고 했다. 그가 다른 ‘슬
라이서’들과 다른 점은 체포되지 않았다는 사실 뿐이었다. 사체를 완벽하게 파괴했다는 점
에서 그는 완전히 ‘슬라이서’였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두 ‘슬라이서’의 정체를 알아내지 못
했고 말이다.

by 월신초 | 2009/10/23 08:33 | 허상 이야기(자작소설) | 트랙백 | 덧글(0)

[TS물] 루트B-2 [한가인]

풀썩
한참 고민하고 있던 사이에ㅣ 갑자기 오빠(라고 주장하는 여자)가 눈 앞에서 실 끊어진 인
형처럼 쓰러졌다. 들을 것이 아직 산처럼 많이 남아있는데 갑자기 무너지듯 앉은 자세에서
그대로 바닥에 무너져 내려 미처 대응할 새도 없었다.
‘어디 몸이라도 안 좋은가?’
당황을 억누르며 일으켜 세워봤지만 마치 잠이라도 든 듯이 고른 숨소리를 내며 눈을 감고
있는 것을 보니 단순히 잠든 듯 했다. 이미 반쯤은 믿고 있던터라 무슨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닌지 걱정하던 마음이 탁 맥이 풀렸다.
“휴우-”
“남매가 똑같군. 내가 나타나기만 하면 기분 나쁘게 한숨이라니.”
“힉!”
‘뭐...뭐뭐뭐, 뭐야?!’
갑자기 어디선가 들려온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주위를 둘러봤지만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
다. 아니, 그 이전에 목소리도 사람의 목소리라고 생각하기 힘든 프로그래밍 된 듯한 목소
리라는 사실도 있지만, 그런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정체모를 공포감이 등골을 따라
식은땀이 되어 흘러내렸다.
“누...누구세요?”
“이쪽을 보라고 아가씨.”
“꺅!”
보이지 앟는 손이 내 턱을 강하게 움켜쥐고 모니터 앞으로 끌어당겼다. 오빠의 몸이 바닥에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지만, 턱에 느껴지는 아픔에 그것까지 신경쓸 수는 없었다.
억지로 보게된 모니터는 기분나쁘게 꿈틀거리는 문자열이 어떤 사내의 얼굴을 그리고 있었
다. 기분나쁜 무기질의 미소를 띄며 문자열이 꿈틀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난폭하게 해서 미안하군. 레이디. 시간이 없어서 말이지.”
사내의 말투에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걸 봐 봐! 이상한 놈이 나타나서 이렇게 해놓고는 갔다니깐.]

사내의 말투에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어쩌면...이 사람이.’
오빠에게 들은 것은 짧은 말에 불과했지만 왠지 그럴듯한 예감이 들었다. 이런 일이 벌어진
배후엔 왠지 이 남자가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문자열의 얼굴이 풍기는 기분 나쁜 분
위기가 그 생각을 부채질했다.
“당신이 오빠를 이렇게 만들었나요?”
“호오? 난 아직 아무 말도 안했는데 어떻게 알았지? 저녀석한테 들었나?”
“아뇨.”
“그럼?”
“감이에요.”
“푸하하하. 유쾌하군! 그래, 내가 했지. 거기다 특별히 에프터캐어도 해주려고 이렇게 온거
라고!”
문자열이 일그러지며 포효와 같은 기분나쁜 웃음소리를 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손이 내
몸을 가볍게 밀어 침대에 앉혔다. 문자열이 한 층 더 촘촘해지며 얼굴을 선명하게 그려냈
다.
“이거이거, 기대 이상이야. 간만에 유쾌한걸? 좀 위험하지만 즐겨야겠어.”
“무슨 얘기에요?”
“간단히 에프터캐어만 좀 할 생각이었는데, 생각이 바뀌었다는 말이지. 아까씨, 소원 없어?”
“오빠를 원래대로 돌려줘요.”
“그건 안되지. 대신 유용한 물건을 주지. 이게 있으면 좀 편할거야.”
허공에서 생겨난 녹색 보석을 얼떨결에 받았다. 순간 알 수 없는 지식의 파편과 영상이 머
릿 속을 파고들었다.
‘이건...오빠의 변화기록?!’
아니, 그렇다기보다 오빠가 다시 태어난 기록이다. 육체가 붕괴되 흔적도 없이 죽은 오빠의
혼을 새로운 몸을 만들며 안착시키는 과정의 ‘마법기록’. 이런 것을 본다면 환상이나 거짓말
로 치부할 수도 없을 것이란 것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다.
“어때? 신기하지? 잘 해보라고. 그녀석보다는 재미있게 해주겠지.”
“이걸로 어쩌란거죠?”
“그건 네가 알아서 해야할게 아닐까? 오빠를 네가 지키는거지.”
“...?”
“네 오빠를 노리는 녀석들이 있을거야. 잘 피해보라고.”
“무슨 말이에요?”
“노 코맨트~. 아차차. 이러려고 온게 아니었지?”
순간 터져나온 눈이 멀 듯한 푸른 섬광에 눈이 부셔서 질끈 감았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 지
는 알 수 없지만 그 남자가 뭔가를 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자, 다 됐으니 이만 가봐야겠군.”
“잠깐만요!”
“싫어, 영혼안착도 해줬으니 내 일은 끝이야.”
모니터의 문자열은 아지랑이처럼 흔들리고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조용해진 방 안에
남은 것은 싸늘하게 식은 공기와 나, 그리고 편안한 표정으로 잠든 오빠뿐이었다. 꺼진 모
니터가 다시 켜질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by 월신초 | 2009/10/20 15:15 | 허상 이야기(자작소설) | 트랙백 | 덧글(0)

[TS물] 루트B-2 [한시인]

“팔...아파.”
“앗, 미안!”
나도 모르게 힘이 들어간 손에서 힘을 빼며 재빨리 물러났다. 가인이의 눈치를 살피지만 가
인이는 잡혔던 양 팔을 감싸안아 문지를 뿐 표정에 큰 변화가 없어 생각을 알 수 없었다.
과연 내 얘기를 믿어줄 것인지 불안에 떨며 가인이의 입이 열리길 기다렸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한참만에야 눈을 마주보며 가인이의 입이 열렸다.
“음...정말 오빠인거지?”
“응! 믿어주는거야?”
다시 의심받지는 않을까 두려워 바로 대답하며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인이도 약간은 체
념한 듯한 눈빛으로 대답했다.
“솔직히 아직도 믿어지지 않지만...이정도까지 이야기를 듣고나면 믿을 수 밖에 없잖아. 이
런 얘기는 단순히 듣는 정도로 알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니까.”
다행이다. 내 얘기가 어떻게든 가인이의 믿음을 이끌어낸 모양이다. 솔직히 내게는 기억외
에는 믿음을 줄 수 있는 것이 없었으니 도박이나 마찬가지였는데...완전하진 않지만 가인이
에게서 믿음을 이끌어 냈다는데 안도감이 들었다. 가슴을 죄어오던 불안감과 긴장이 확 풀
리는 느낌이 들었다.
“후우~”
“......?”
“어쩌다 이렇게 된거야?”
“그...그게...나도 잘....”
나도 모르게 시선을 피해버렸다. 질문을 받고서야 눈치챘다. 사정을 설명해야 하지만 난 그
걸 설명할 수 없잖은가! DC하다가 올린 글 때문에 이렇게 된거고 그 글이 그런 남사스러운
내용임을 여동생에게 말한다는 건 입이 찢어져도 할 수 없다. 가인이의 짙어지는 의심의 눈
길을 피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뭐라고 해야 넘어갈 수 있을까? 생각하자. 생
각하자.
“이..인터넷에 여자가 된다면 어떨까...하는 글을 썼더니....”
두리뭉술한 대답을 하며 공허한 헛웃음과 함께 시선을 피했다. 현실도피하는 듯한 의도적인
연출이다. 동생에게 얼마나 먹힐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상황에서 이 이상의 방법은 떠오르지
않기에 강행한다. 뭐 틀린 말도 아니고....
“인터넷에 그런 글 하나 쓴다고 이렇게 될 리가 없잖아!”
“깜짝이야.”
갑자기 버럭하고 고함치는 동생덕에 조마조마하던 심장이 덜컥 떨어지는 줄 알았다. 하지만
반쯤은 사실인걸 어쩌나... 오히려 서러움이 북받쳐올랐다. 다시 눈물이라도 날 것 같았다.
딱히 보여줄 증거가 없나? 생각하다가 모니터에 뜬 글에 신경이 미쳤다. 부족하나마 도움이
될까?
“이걸 봐봐! 이상한 놈이 나타나서 이렇게 해놓고는 갔다니깐.”
“오빠가 장난친건 아니고?”
“내가 이런걸 할 줄 알 리가 없잖아!”
부끄럽지만 동생보다 컴퓨터를 못 다루는 사실이 이런 곳에서 도움이 될 줄은 몰랐다. 기묘
하게 반응없이 기묘한 문자열만 표시한 채 꺼지지도 않는 컴퓨터가 비정상적인 현실을 반영
하고 있었다. 바라보고 있으려니 놈의 기분나쁜 웃음소리가 귓가를 맴도는 듯한 기분마저
들어 고개를 돌렸다.
컴퓨터를 두드려보고 전원버튼이나 키보드도 마구 눌러보는 것도 모자라 코드까지 뽑아보던
동생은 이윽고 포기했는지 내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턱을 괸 채 심각하게 고민하는 것이
빤히 보였다. 그래도 일단은 부정을 하지 않는 것을 보니 통한 것일까? 나로서도 미심쩍은
증거긴한데....
“으으음....”
동생의 고민이 길어질수록 내 속은 바짝바짝 겨울날의 장작불처럼 타들어갔다. 계속되는 고
난에 마음이 넉다운되서 몸마저 휘청일 지경이었다. 아니, 실제로 어질어질하고 눈 앞이 뱅
글뱅글 도는 것 같은데...? 어라라...안 되는...데....

by 월신초 | 2009/10/20 15:14 | 허상 이야기(자작소설)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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